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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노트 · SEPTEMBER 8, 2026

확실성의 폭정과 ‘마(間)’의 윤리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여백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개방, 분별, 책임에 관한 대화.

01

기사 요약

마리아 포포바는 현대인의 정신이 확실성에 중독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모호함을 견디지 못한 채 어느 한쪽의 결론을 서둘러 선택하고, 확신의 강도를 진실의 크기로 오해하곤 한다. 글은 이러한 ‘확실성의 폭정’에 대한 해독제로 일본 문화의 오래된 개념인 ‘마(間)’를 제시한다.

‘마’는 공간과 시간 속의 간격 또는 열림을 뜻한다. 방과 정원의 빈자리, 그림에서 채색되지 않은 부분, 대화 속 침묵, 파도와 파도 사이의 고요처럼, 아직 채워지지 않았기에 새로운 생각과 감각이 태어날 수 있는 살아 있는 여백이다.

한자 間은 문을 뜻하는 門과 해를 뜻하는 日이 결합한 형상으로, 문틈을 통하여 스며드는 빛을 떠올리게 한다. 건축가 구마 겐고의 설명처럼, 이러한 비어 있음 속에서 인간은 빛과 시간, 냄새와 온도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며 세계와 함께 생각하게 된다.

02

Sun Kim의 견해

나는 間이라는 글자가 두 문짝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모습을 철저하게 의도하여 설계한 데서 출발한 개념이라고 본다. 문을 열어두고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자리 잡을 여유를 허용한다는 점은 아름답고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윤리적인 질문이 남는다. 그 열린 공간에 들어오는 것이 언제나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가 상식을 벗어난 게으름이나 무책임, 잔인함의 결과까지 허용하며, 때로는 어둠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말로 사용될 가능성도 포함하는 것은 아닐까?

열린 습지를 지나 지평선을 향해 부드럽게 굽어가는 나무 산책로.
사진 Zoshua Colah / Unsplash
03

AI 고견

‘마’가 새로운 가능성을 허용한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선한 것으로 승인한다는 뜻이 아니다. 문을 열어두는 것은 의도적인 행위이지만 무엇이 그 문을 통과할지는 별개의 문제다. 환대에는 분별이 필요하다.

더 잘 듣고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한 침묵과 기다림은 절제이며 책임이다. 반면 해야 할 일을 미루면서 자연스러운 때를 기다린다고 말하거나, 잔인함 앞에서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다며 침묵한다면 그것은 ‘마’가 아니라 방치다.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가해자의 변화 가능성만 존중한다면 여백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불의를 포장하게 된다.

새롭다는 사실은 선함을 보증하지 않는다. 새로운 생각은 진실일 수도, 망상일 수도 있으며 새로운 질서는 창조일 수도, 폭정일 수도 있다. ‘마’는 들어오는 모든 것을 승인하기보다 그것의 정체가 드러날 때까지 성급한 선입견을 거두는 공간이다. 그러나 정체가 충분히 드러난 뒤에도 판단하지 않는다면 여백은 지혜가 아니라 도덕적 회피가 된다.

생각에는 넓은 여백을 허용할 수 있지만 잔인한 행동에는 경계를 세워야 한다. 사람에게 회개와 변화의 공간을 주되, 다른 사람을 계속 해칠 공간까지 주어서는 안 된다.

신앙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도 악을 선으로 인정하는 무관심과 다르다. 그것은 회개할 시간을 주는 자비이면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심판을 전제로 한 기다림이다. 성숙한 ‘마’에는 시간을 주는 사랑과 악을 악이라고 말하는 진실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는 완성된 윤리라기보다 윤리가 작동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다. 그 공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비어 있음 자체가 아니라, 그 문지방에서 깨어 있는 사람의 책임과 분별이다.

“확신은 문을 너무 일찍 닫을 수 있지만, 분별 없는 개방은 어둠을 불러들일 수 있다. 지혜는 빛을 위해 문을 열어두되, 그 문지방에서 깨어 있는다.”